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램지 맥도널드 (문단 편집) ===== 거국내각 총리: 1931년 8월 24일 ~ 1935년 6월 7일 ===== [[대공황]]의 한가운데에서 갑작스럽게 정권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은 [[조지 5세]]는 맥도널드 총리에게 위기 극복을 위한 [[거국내각]] 수립을 제안했고, 맥도널드는 이를 받아 보수당, 자유당과 '''국민정부(National Government)'''라는 이름의 거국연립정부를 수립하기로 한다. 이로 인해 노동당은 그야말로 두 개로 쪼개졌는데, 맥도널드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은 국민노동당(National Labour)으로 분리되어 나갔으며 노동당에는 아서 핸더슨 등 보수당과의 연립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남았다. 졸지에 정권을 잃은 노동당은 분노에 차 맥도널드 총리, 스노든 재무장관 등을 당에서 제명했지만 이미 버스는 떠나버린 상황이 됐다. 노동당의 강력한 지지층이었던 노조의 분노가 맥도널드와 국가노동당을 덮쳤고, 런던과 맨체스터에서는 연이어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노동당에 남은 수많은 사람들 역시 맥도날드가 자기만 살려고 당을 버린 배신자라고 비판했으며 맥도널드는 그 희생이 공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취임 직후 있었던 총선에서 국민 정부 내 다수당을 차지한 보수당이 국민정부가 선거 연합을 해 선거를 치르도록 맥도널드 총리를 압박했고, 노동당은 사실상 유일한 야당으로서 선거에 임하게 됐다. 결국 선거에서 국민정부 연합이 615석 중 554석(90.1%)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두며 정권을 연장하는 데 성공한다. 근데 이중 470석을 보수당이 차지하면서 거국내각은 사실상 보수당 정부가 된다.(...) 덕분에 명목상 맥도널드는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의석 수를 보유한 총리가 됐지만, 실제 권력은 추밀원의장에 오른 스탠리 볼드윈 전 총리와 새롭게 재무장관에 오른 [[네빌 체임벌린]]이 주도하게 되면서 일종의 [[바지사장]]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오타와 협정 체결 이후 관세가 도입되자 맥도널드의 동료로 함께 해왔던 필립 스노든 역시 이에 반대해 내각을 떠나고 만다. 1934년에는 당시 연립정부의 재무장관이었던 네빌 체임벌린이 일본 외무대신으로 재임하고 있던 [[히로타 고키]]와 접촉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종료된 [[영일동맹]]을 대체하는 영일불가침조약을 새로 체결하려 했지만, 램지 맥도널드는 이 조약이 미국에게 영일동맹의 재림으로 보일까 우려했고, 일본 역시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이권을 보장해줄 의지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 탈퇴 통보를 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주로 외교 문제에 집중하는데 여러 군축 활동, 세계 경제회의 주재 등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르니, 바로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독일을 상대로 유화책을 실시하면서 [[나치 독일]]이 성장할 시간을 주고 만다. 1935년까지 자리를 유지했으나 건강이 계속 악화되어 총리직을 계속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스탠리 볼드윈]]에게 다시 총리 자리를 양보하고 사임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